바르셀로나여행 가우디투어 까사밀라CasaMila 두번째이야기 Part2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은 가우디 투어로 계속 이어집니다. 이전 까사밀라(CasaMila) 글에 이어서 두 번째 이야기를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한 세기가 넘도록 바르셀로나는 자타공인 가우디에 도시였습니다. 도시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가우디가 활동했던 19세기 말 역시 스페인 건축 역사상 가장 상상력이 풍부했던 가우디의 시대였습니다. 바르셀로나를 한나절만 걷다 보면 가우디 코스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숨결이 살아있는 바르셀로나의 까사밀라 이야기를 이어서 포스팅해봅니다.
(*기존 티스토리 블로그 콘텐츠를 옮겨오고 있습니다. 메뉴를 포함한 가격은 최신 정보로 업로드되고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까사밀라 II 목차
1. 까사밀라 전시관
2. 까사밀라 내부
3. 까사밀라 투어
가우디의 손을 거쳐 탄생한 공동주택 까사밀라는 거주지라는 건물이라고 말하기에는 작품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가우디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입히면 평범하고 밋밋한 건물도 구불구불한 곡선이 살아있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까사밀라 가는법, 운영시간, 입장료는 까사밀라 Part1에서 확인 해주세요. 까사밀라 Part1 (원문보기)
까사밀라 전시관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언제나 따라붙습니다. 연간 3000만 명이 넘는다는 어마어마한 방문객들 중에서 가우디의 작품을 한 개도 안 보고 떠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웬만해선 가우디 투어, 가우디 코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니 지난 100년 동안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고 있는 사람이 가우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까사밀라는 오늘날 20세기 건축 베스트 10에 선정되었고, 가우디 건축의 최대 예술작품으로도 손꼽히는 곳입니다. 까사밀라 전시장은 옥상으로 연결되는 복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가우디는 까사밀라를 설계할 당시부터 옥상과 복도를 까사밀라 거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려고 계획했다고 합니다. 100년 가까이 된 건물이지만 보존이 잘되어 있습니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까사밀라는 그저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까사밀라 가우디 전시장에는 까사밀라 건축구조 공법, 까사밀라 층별 특징, 가우디가 제작한 가구와 가우디의 유명 건축물들을 전시해놓은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이곳의 천장은 포물선 아치가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이곳은 경사가 다른 두 면이 만나는 지붕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의 천정은 지붕을 가장 안정적으로 지탱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구조물을 설계 시 가장 핵심은 힘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인데, 구조역학이 정리되지도 않았던 시대에 총알을 작은 주머니에 매달아서 건축물의 균형이 맞는지 시공 전에 이렇게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있는 가우디 관련 전시관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에 있는 거울을 통해 보면 건축물의 모양이 나타납니다.
어떤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사랑,
두 번째로 기술이 필요하다.
Antoni Gaudí
가우디의 유명 건축물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까사바트요 모형도 보였습니다. 가우디의 건축물의 큰 특징은 바로 자연과 함께 살아 숨 쉬는 건축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가족 성당, 구엘공원도 그러했듯이 까사밀라도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을 담았습니다.
내 작업실 앞에 있는 나무
그 나무가 나의 스승이다.
Antoni Gaudí
가우디는 생전에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자연을 찾아내어 창조주와 협력하는 것뿐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작품에는 늘 자연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가우디를 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우디의 고향은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마을 레우스(reus)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레우스(reus)는 지중해 빛 태양 아래 풍요로운 자연이 가득한 곳이 있고, 어렸을 적부터 자연의 품에서 대부분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가우디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작품의 소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가우디에게 있어서 디자인이란 창조가 아니라 하나의 발견일 뿐이었고, 가우디는 직선보다는 곡선을 즐겨 사용했으며, 동물이나 식물의 문양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우디는 늘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기둥은 나무줄기나 그루터기와 같고,
지붕은 산등성이와 산비탈이 있는 산과 같으며,
둥근 천장은 포물선 모양의 동굴이고,
튼튼한 테라스는 산의 절벽 모양이다.
Antoni Gaudi
가우디의 가구 의자는 의도적인 표현력과 함께 기능성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신체에 적합한 가구로 제작하였습니다. 의자의 모양도 똑같은 형태 없이 하나같이 다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까사밀라 내부 공간과
가우디의 마지막 이야기
가우디는 하나의 설계도도 수백 번을 고치는 완벽주의자였다고 합니다. 건축의 천재 가우디는 74세의 나이에 전차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마치 수도자처럼 오로지 건축에만 생애를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고독하며 쓸쓸했습니다. 1926년 6월 7일 오후 6시, 노년의 가우디는 기거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공사장에서 나와 산 펠립 네리 성당까지 산책을 나갔습니다.
이 당시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 설계 일에 빠져 자기 자신조차 돌보지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시간을 작업실과 산 펠립 네리에 있는 성당에서의 미사만이 하루의 일상이었습니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4차선 대로를 건너다 달려오던 30번 트램에 치여 쓰러진 노인을 도와주는 행인은 없었습니다. 평소에도 신분증 없이 다 해진 거지꼴로 다닌 가우디를 사람들은 노숙자로 오해하고 방치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노인을 병원에 데려가려고 택시를 잡았지만 승차 거부가 이어졌다. 그렇게 초라한 행색에 신원미상의 행로 병자로 병원으로 실려온 가우디는 사고 직후 응급조치를 받지 못했고, 지나가던 경찰이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너무 늦었습니다. 구호병원으로 옮겨진 후 다음날 그의 친구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시설이 좀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그는 '나는 여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있겠네'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3일 뒤인 6월 10일에 노인 가우디는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가우디는 전 재산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기부할 것과 장례 행렬은 만들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평생을 갈구하던 신의 곁으로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74세였다. 가우디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습니다. 그의 관을 따르는 행렬이 시가지를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74세에 세상을 떠난 그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는 성가족 성당의 지하에 묻혔습니다. 까사바트요는 내부 입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까사밀라가 가우디 투어의 마지막 일정이자 가우디의 작품을 자막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기에, 가우디의 마지막 이야기도 함께 기록해봤습니다.
까사밀라 투어
까사밀라는 현재도 주거 공간으로 쓰이기 때문에 일부 공개된 실내 모습을 보기 위해 전시장을 나와서 내부도 구경했습니다. 옛날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을 재현해 놓았는데,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주부라서 꾸며진 공간들을 보면서 꼼꼼히 사진에 담아봤습니다.
미니어처 하우스를 평소에도 너무 좋아하는데, 까사밀라 실내에도 전시되어 있는 미니어처 하우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디테일은 말할 것도 없고 엔틱스러움과 빈티지한 인테리어, 벽지, 조명까지 까사밀라의 예전 실내 모습을 작게 재현해놓았습니다.
이곳은 아이가 지냈던 방을 꾸며놓았던 공간이라 장난감, 인형 등으로 재현되어 있었습니다. 까사밀라의 실내 구경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까사밀라의 복도에는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공개된 공간들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공간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공간마다 섬세함이 느껴집니다. 복도를 지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가우디 전시장에 있던 가우디가 디자인한 의자가 있었습니다. 직접 앉아 보니 정말 편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희도 기념사진을 하나 남길 수 있었습니다.
까사밀라의 실내는 따스한 햇살이 어느 곳을 가도 비춰주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다용도실 같은데 이곳에도 난방시설이 있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문과 문고리도 그냥 지칠 수 없는 가우디의 새심함과 설계 당시 예술과의 통합의 중요성도 가늠케 합니다. 까사밀라의 문만 보더라도 똑같은 것들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문고리의 경우도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인체공학적인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고 하니 천재 건축가답습니다.
욕실도 지금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디자인과 색감입니다. 무엇보다 온수가 나오는 최신식 설비가 갖춰져 있다는 게 대단했습니다. 까사밀라는 지하주차장과 중앙난방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그 당시 최고급 빌라였다고 합니다
밀라 부인의 화장대 옆에 가우디는 이러한 문구도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인간은 한 줌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어떤 건축가가 자신의 건축주에게 이러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남길 수 있을까요? 역시 창의적인 열정으로 작품을 지속하면서 깨달은 가우디의 예술혼이 간직한 위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우디가 죽은 뒤 밀라 부인은 가우디의 흔적을 모두 없애고, 자신이 좋아하는 루이 15세의 로코코 장식을 가미하여 석주와 천장에 석고를 바르고 그 위에 몰딩이나 코니스 장식을 고전적으로 새롭게 단장했다고 합니다.
밖에서 볼 때의 까사밀라는 각진 곳 하나 없이 큰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발코니 철제 장식은 해초들이 무성합니다. 안에서 보니 더욱 그렇게 보였습니다. 철을 구부려서 만든 이 장식은 철을 자유자재로 잘 다루는 가우디의 주특기입니다.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그때 익힌 솜씨가 가우디 건축 곳곳에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까사밀라는 여러 화려한 장식이 없어도 곡선 하나로만 이런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이 건물 전체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파도타기를 하는 듯합니다. 머리 위 천정부터 눈길 가는 곳마다 곡선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각각의 공간도 섬세하게 살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까사밀라는 구조적인 특징은 기둥을 세우고 피부처럼 그 위에 돌을 입히는 작업으로 까사밀라를 설계했었습니다. 또한 밖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채광과 환기를 위한 두 개의 안뜰이 있습니다. 안뜰을 중심으로 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무게를 그 기둥들에 집중을 시켜서 층을 올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없었던 처음 시도되는 방법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자연을 닮고 싶어 했던 가우디는 그에게 자연은 구조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가우디에게는 피조물인 자연이 가장 완벽에 가까운 구조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축가로서 그의 꿈은, 완벽한 자연의 형태나 구조를 재현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신앙심이 깊었던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자연은 신의 작품이자, 신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스페인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 바르셀로나에서 마주한 경이로운 건축가 가우디와의 여행은 까사바트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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