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여행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예술과 역사 속을 거닐다

스페인 마드리드 여행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면 역시 프라도 미술관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드리드는 스페인 역사의 화려함을 곳곳에 느낄 수 있는 역사와 예술이 만나는 도시인 것 같습니다. 마드리드는 고도 600미터가 훌쩍 넘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입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스페인은 땅덩어리만 거대할 뿐만 아니라 금은보화를 포함해 모여드는 재물도 엄청났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수도를 톨레도에서 1561년 마드리드로 옮긴 이유는 국토 중앙에 위치한 마드리드가 어느 지역에서도 거리상 업무를 효율적으로 보기 위해 최적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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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목차

1.프라도 미술관 이야기
2.프라도 미술관 풍경
3.국가별 전시소개
4.벨라스케스, 고야에 대하여
5.프라도 미술관 쇼핑리스트

프라도 미술관 이야기

프라도 미술관은 마드리드 최고의 자랑이라고 할 만큼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유럽의 중세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회화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엘그레코(El Greco),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벨라스케스(Velázquez) 3대 거장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들은 남의 나라에서 약탈해 온 작품들이 아닌 대부분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 작품과 스페인 왕실 소장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마드리드-프라도미술관-입구

작품 수 또한 어마어마해서 ‘세계 명작의 보고’로 불릴 정도입니다. 언제나 수많은 관람객으로 붐비는 곳입니다. 현장에서 줄을 서서 입장권을 구입하기 보다는 미리 예매를 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페인-프라도미술관-벨라스케스 동상

프라도 미술관 입구는 고야 문, 벨라스케스 문, 무리요 문 이렇게 3곳이 있고, 그들의 동상들이 서있습니다. 날은 흐리고 부슬부슬 비는 내렸지만 벨라스케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남겨봅니다.

프라도 미술관은 오후 6시 무렵에는 두 시간 동안은 무료 입장을 한다고 하니 표를 구입하지 못했다면 그시간에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스페인이 이토록 설레이는 이유는 프라도 미술관의 수많은 작품들을 직접 눈에 담을 수 있는 이순간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gif파일-프라도미술관-벨라스케스동상
스페인-마드리드여행

프라도 미술관 풍경

거리의 악사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합니다. 스페인에서 거리의 악사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대부분은 아니지만 저희 가이드분이 되도록이면 돈을 주지말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사기꾼이 많다는 것입니다. 손만 움직이고 CD를 틀어놓는 거죠. 음악 감상한 팁을 꼭 다 주시지 말고 진짜 연주를 하는지 잘 보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보통 본인이 직접 연주를 하는 게 아니면 가까이만 가면 음악을 딱 꺼버리고 손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분은 직접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라도미술관-거리의악사-기타연주
프라도미술관 -주변경관

고야의 동상이 보입니다. 프라도 미술관의 유명한 작품을 다 보려면 시간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8,000점이나 되는 작품들을 다 보는 건 욕심이겠지만 말이죠. 스페인 마드리드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마냥 부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곳을 거닐고 몇달이 걸려도 미술관에 있는 작품을 다 둘러 볼 수 있을테니까 말이죠. 프라도 미술관 주변을 산책하듯이 둘러보았습니다.

프라도미술관-입장권

입장권도 너무 이쁘답니다. 같이 갔던 일행들의 입장권도 저와 같거나 다른 작품이 들어가 있는 입장권을 받았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등장하는 공주 입장권을 받았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국가별 전시소개

◎스페인 회화
12세기 로마네스크 벽화에서 19세기 고야의 작품까지 연대순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전 층에서 볼 수 있습니다. 0층에서는 중세와 르네상스 회화, 1층에서는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그리고 벨라스케스가 사사한 무리요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탈리아 회화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보티첼리에서 베나치아 출생의 18세기 로코코 화가 티에플로 작품까지 다양하게 소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라파엘로 작품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틴토레토, 바사노, 베로네제, 티치아노, 등 베네치아 화파의 그림이 집중된 전시도 볼만 합니다.

◎플랑드르 회화
스페인 왕정의 통치를 받던 플랑드르 지방의 플랑드르 회화 작품을 다수 전 소장하고 있습니다.

◎독일 회화
소장량이 적은 편이지만 독일 르네상스기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뒤러의 작업실에서 일한 발둥 그리엔 등의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회화
17세기 스페인 계승 전쟁을 전후로 프랑스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는데,이때 전달받은 작품을 중심으로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등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영국 회화
18, 19세기 인물화를 중심으로 소장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조슈아 레이놀즈, 게인즈버러 입니다.

프라도 미술관-입장

미술관내부는 촬영이 금지입니다. 로비 카운터에 날카로운 물건이나 가방, 카메라 등 모두 보관하고 들어가야합니다. 물론 물도 안된다고 합니다. 저희도 구입한 물은 다 마시고 입장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도 많은편이라 이렇게 한국어 안내 자료가 준비 되어있습니다. 입장하기 전 로비 사진도 담아봅니다. 8,000점이 넘는 작품을 다 보려면 1년으로도 부족한 방대한 양이라고 하니 오늘 보는 감상할 수 있는것은 유명한 작품 몇점이 될 것 같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몇 작품을 소개해보겠습니다.

프라도 미술관 감상 작품

◎고야 Goya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카를로스 4세와 스의 가족, 자화상,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옷 벗은 마하, 옷 입은 마하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Rodríguez de Silva Velázquez
동방박사의 경배, 시녀들, 바쿠스의승리

◎엘그레코 El Greco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히로니뮈스 보스 Hieronymus Bosch
일곱 가지 중죄,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아담과 하와

◎티치라노
비너스와 아도니스, 바쿠스의 축제

그 밖에도 너무 많은 보티첼리, 오지에, 반 네르바 이젠, 라파엘로, 귀도 레니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 수많은 작품과 역대 유명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에 대하여

벨라스케스는 스승이자 장인어른인 세비야 화가 파체코의 권유로 백작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계기로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본 펠리페 4세는 흡족해 하며 그를 궁정화가로 임명하였고 평생을 벨라스케스 외에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왕의 총애를 받던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라 해도 당시 화가는 신분이 미천하였기 때문에 평생 소원이 귀족이 되는 거였고 고맙게도 왕은 그를 귀족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최고의 명작 ’시녀들(Las Meninas)’의 그림 속 멋진 콧수염을 하고 서있는 화가는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입니다. 화가의 모습을 보면 옷 가슴팍에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상징인 붉은 십자가가 담겨져 있습니다. 순수한 혈통의 명문 귀족만 가입 할 수 있었기에 벨라스케스도 번번히 심사에서 떨어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결국 펠리페 4세의 입김으로 죽기 1년 전인 1659년에야 기사단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녀들’이 그려진건 1656년이었으니 이 십자가를 보고 지금까지도 벨라스케스가 기사단이 되자마자 바로 덧그려 넣었다는 설과 그가 죽은 후 왕이 그를 위해 그려 넣게 했다는 설이 팽팽이 맞서고 있다고 합니다.
벨라스케스는 1660년 여름 과로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나는 높은 수준에서 2등이 되기보다는 평범한 수준에서 1등 화가가 되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궁정화가의 뒤를 이은 고야가 가장 존경한 인물도 벨라스케스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가까이서 보면 거친 붓 터치지만 멀리서보면 빛과 함께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나는 작품들입니다. 훗날 인상파 화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야에 대하여

고야는 여러 그림대회에서 낙방을 하면서 심사위원들의 취향이 중요하단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드리드 그림대회에서 떨어졌던 아픔을 잊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사전 탐문 끝에 그들이 선호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합격장을 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야가 돌아왔을 당시 사라고사 대성당을 장식할 화가 모집을 하고 있었고 고야는 여기서도 사전 정보를 찾고 탐문하여 경쟁자가 제시한 급료보다 무려 절반이나 뚝 잘라 제시를 했습니다. 이런 돈을 줘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할리가 없으니 당연히 고야가 합격을 하게 됩니다. 이 작업은 이미 내정된 고향 선배이자 궁정화가인 프란시스코 바예우와 함께 했습니다. 고야는 처세술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예우의 여동생인 호세파와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그는 처남을 통해 출셋길에 오르고자 하였고, 이듬해 처남의 연줄로 왕실 벽을 장식할 태피스트리 밑그림 작업을 따냈습니다. 꼼꼼하고 화려한 태피스트리는 그동안 접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왕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또한 카를로스 3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귀족들이 그를 앞다퉈 찾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고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고야는 유독 손가락을 그리는 것을 꺼려했다고 합니다. 손을 포개거나, 주머니에 넣거나 뒷짐 지는 포즈로 어떻게든 손가락을 그림에서 밀어냈습니다. 손가락 수가 그림 값을 매기는 기준이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야의 사생활은 그리 바르게 생활하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초상화속 모델인 귀부인들과 바람을 피고 술집을 매일 같이 드나들었습니다.이런 와중에도 아내도 챙겼는데 무려 20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39년을 평생 아이를 낳고 키우던 아내는 1812년에 세상을 뜨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간 아이들 중에 살아남아 어른이 된 자식은 단 1명 뿐이었습니다. 고야는 1792년 고열을 동반한 중병으로 죽다가 살아나게 되었고, 후유증으로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이후 고야는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고야는 지금까지와 달리 부조리한 세태를 고발하는 풍자화가로 돌아서게 됩니다.‘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부제를 단 판화집 '변덕'은 성직자들을 괴물로 묘사하며 부패한 카톨릭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이나 한층 어두워진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또한 일흔이 넘는 나이에 고야는 마드리드 외각에 외딴집에 거처를 옮겨 머물며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검은그림'이라 일컫는 열네 개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건‘사람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입니다. 이 작품의 경우 자식들이 자신의 자리를 뺏을 것이란 예언을 믿은 아버지가 그 자식들을 잡아 먹는다는 신화의 한 장면인데 이를 두고 고야 전문 작가 홋타 요시에는 스무명 중 열아홉이나 되는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아버지로써의 자신의 죄책감을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고야는 죽어서도 편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절대 왕정을 거부하고 입헌정부를 지지한 탓으로 왕에게 미움을 받아 사실상 망명이나 다음없이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고 그곳 에서 건강 악화로 1828년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시신은 보르도에 묻힌 사돈 무던 한 귀퉁이에 묘비도 없이 묻히게 되었고 60년이 흘러서야 마드리드로 옮길려고 보니 관은 이미 썩어버려 흔적도 없었고 사돈의 유골과 어지럽게 섞여 누가 고야의 유골인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비극은 이뿐이 아니라 유골 중 머리는 하나 뿐이었고 검사를 한 결과 그마저도 주인은 고야의 사돈으로 밝혀졌습니다.누군가 고야의 유골을 훼손하고 머리를 훔쳐 간 것이었습니다. 그상태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단 무덤을 덮고 10여년이 더 지나서야 머리 없는 유골이 조국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그는 마드리드읜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에 안치 되어있습니다.

프라도 미술관 쇼핑 리스트

프라도 미술관은 내부 촬영이 안되기 때문에 많은 사진을 담아 올 수 없어서 뮤지엄 숍에서 프라도 미술관 작품이 담겨져 있는 서적을 구입했습니다. 뮤지엄 숍은 프라도 미술관 G층 한곳, 1층에 두곳이 있습니다. 명화를 담은 엽서도 구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양'입니다. 이외에도 여려 기념품을 구입 했습니다.

프라도미술관-기념품리스트

스페인 마드리드 여행 프라도 미술관은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곳 이었습니다. 첫 일정부터 비가와서 울쩍 했지만 날씨는 여행에 있어서 어쩔수 없는 부분인것 같습니다. 방문 하는 도시마다 엽서를 모아서 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잘 사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쪽 벽면을 여행 다녔던 엽서들로 채워질때 마다 행복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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